얼마 전 인터넷에서 눈길을 끄는 제목의 글을 보았습니다.
‘같이 밥 먹어보면 가난하게 자란 티가 나는 행동 1위’
글에서는 밥을 지나치게 빨리 먹는 행동, 음식을 남기지 못하는 행동, 식당에서 필요한 것을 제대로 요구하지 못하는 태도 등을 어린 시절의 가난이나 결핍과 연결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정말 사람의 식사 습관만 보고 어린 시절의 경제적 환경을 알 수 있을까요?
그러다 제 식습관과 제가 알고 지낸 사람들의 행동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질문은 조금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행동을 어디까지 해석해도 되는 걸까요?
어린 시절의 결핍은 성인의 식습관에 남을 수 있다
어린 시절의 경제적 환경이나 식량 부족 경험이 이후의 식행동과 관련될 수 있다는 연구는 있습니다.
덴마크 청소년 1,904명을 20여 년 뒤 추적한 연구에서는 어린 시절과 성인기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성인이 된 후의 음식 섭취 패턴과 관련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캐나다 퀘벡의 종단연구에서는 4.5세부터 13세까지 식량 불안을 경험할 위험이 높았던 집단이 22세가 되었을 때 일부 음식 섭취와 아침 결식 등의 식습관에서 차이를 보였습니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어린 시절 낮은 사회경제적 환경이 배가 고프지 않은 상황에서의 음식 섭취 조절과 관련될 가능성도 제시됐습니다.
따라서 어린 시절의 경제적 환경이나 음식 부족 경험이 이후의 식습관과 관련될 수 있다는 것은 연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과 ‘그 행동을 보면 가난하게 자랐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제가 확인한 연구들에서는 ‘밥을 빨리 먹는다’, ‘음식을 남기지 못한다’, ‘식당에서 추가 반찬을 요구하지 못한다’는 세 가지 행동만으로 어린 시절의 가난 여부를 판별할 수 있다는 근거는 확인하기 어려웠습니다.
집단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어떤 경향이 발견됐다고 해서 그것을 눈앞의 한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밥을 빨리 먹는다, 하지만 이유는 달랐다
저도 보통 사람보다 밥을 조금 빨리 먹는 편입니다.
직장생활을 할 때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모두 남성이었습니다. 점심을 먹으러 가면 동료들은 식사 속도가 빨랐고 먼저 식사를 마친 뒤 제가 다 먹기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매일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저도 자연스럽게 그들의 속도에 맞추게 됐습니다.
그때 생긴 습관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제가 밥을 빨리 먹는 모습을 보고 ‘어린 시절 먹을 것이 부족했나 보다’라고 생각한다면 완전히 잘못된 추측입니다.
같은 행동이라도 그 행동이 만들어진 이유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어린 시절의 결핍 때문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직업환경이나 가족의 식사문화 때문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오래된 생활습관일 수도 있습니다.
행동은 눈에 보이지만 그 행동이 만들어진 과정은 보이지 않습니다.
습관에는 한 사람이 살아온 시간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습관 하나만 보고 그 사람의 과거까지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해는 편견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행동을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까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겼습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정이 있으니 상대의 행동을 모두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가족과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였습니다.
밥은 남았는데 반찬이 부족해서 조금 더 달라고 하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식사하던 가족은 식당에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것을 몹시 불편해 했습니다.
자신이 부탁하지 못하는 것 뿐 아니라 제가 부탁하는 것까지 말렸습니다.
저는 그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돈을 내고 식사를 하고 있고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닌데, 왜 필요한 것을 말해서는 안 되는지 의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서운했던 것은 다른 사람의 불편함을 염려하면서 정작 함께 있는 나의 필요는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는 지금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싫어하는 성향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를 제가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행동으로 내가 어떤 경험을 했는지는 외면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와 “나는 어떻게 대우받았을까?”
가까운 사람의 행동 때문에 힘들 때 우리는 자주 그 사람의 이유부터 찾습니다.
‘그 사람도 힘들게 자라서 그랬겠지.’
‘원래 표현을 못하는 사람이니까.’
‘남에게 폐 끼치는 것을 싫어해서 그런 거겠지.’
상대의 행동에는 우리가 모르는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해하려는 태도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상대를 이해하는 데만 마음을 쓰다 보면 더 중요한 질문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그 행동 속에서 나는 어떻게 대우받았는가?”
상대에게 사정이 있었다는 사실과 내가 상처받았다는 사실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상대를 이해하는 것과 나를 보호하는 것도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필요한 것을 말한다
지금의 저는 식당에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이야기합니다.
“반찬 조금 더 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 상대에게 예의를 갖추어 말합니다.
권리를 행사한다는 것이 상대에게 함부로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존중하면서도 나에게 필요한 것을 정당하게 요청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식당에서 반찬을 더 달라고 말하는 문제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에게 사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나를 함부로 대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상대를 미워하지 않으면서 거리를 둘 수도 있고, 그 사람의 과거를 이해하면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행동에는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왜 ‘가난하게 자란 사람의 특징’을 클릭할까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런 제목에 끌리는 걸까요?
‘가난하게 자란 티가 나는 행동’이라는 제목에는 몇 가지 행동만으로 다른 사람의 숨겨진 과거를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은 호기심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글을 읽다 보면 시선은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나는 밥을 빨리 먹는데.’
‘나도 음식을 잘 남기지 못하는데.’
‘나도 식당에서 무엇인가 부탁하는 게 어려운데.’
그러다 부모나 배우자, 친구와 직장동료까지 떠올리게 됩니다.
결국 타인의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나와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돌아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콘텐츠를 읽을 때 필요한 질문은 의외로 간단할지도 모릅니다.
“정말 그런가?”
누군가의 설명을 곧바로 사실로 받아들이기보다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것과 나를 지키는 것은 함께할 수 있다
사람의 행동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어린 시절이 있고, 살아온 환경이 있고, 상처와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습관이 있습니다.
그러니 몇 가지 행동만 보고 한 사람의 인생을 함부로 규정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의 행동 때문에 내가 받은 상처까지 부정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상대의 사정을 이해하되 나의 감정도 존중하는 것.
상대를 배려하되 나에게 필요한 것도 말하는 것.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을 쉽게 규정하기보다, 그 행동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보는 것.
어쩌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이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것과 나 자신을 함부로 대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은 동시에 가능합니다.
그 두 가지 사이에서 자신의 경계를 지키는 것.
저는 그것이 타인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조금 더 다정하고 성숙하게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자료
-
Adult food intake patterns are related to adult and childhood socioeconomic status
덴마크 청소년 1,904명을 20~22년간 추적해 어린 시절과 성인기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성인기의 음식 섭취 패턴을 살펴본 연구입니다.
PubMed에서 연구 보기 -
Experiencing food insecurity in childhood: influences on eating habits and body weight in young adulthood
캐나다 퀘벡 종단연구 참가자 698명을 분석해 어린 시절부터 청소년기까지의 식량 불안과 22세 때 식습관 및 체중의 관계를 조사한 연구입니다.
PubMed에서 연구 보기 -
Low Childhood Socioeconomic Status Promotes Eating in the Absence of Energy Need
어린 시절의 사회경제적 환경과 현재의 에너지 필요에 따른 음식 섭취 조절 사이의 관계를 살펴본 연구입니다.
PubMed에서 연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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